[001]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002] 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주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003]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004]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005]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 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006] 찔레꽃 받아들던 날 / 김용택
오월의 숲에 갔었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숲속을 찾아드는 햇살은
아기 단풍잎에 떨여져 빛나고
새들은 이 나무 저 가지로 날며 울었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천천히 흔들리고
우리도 따라 나무처럼 흔들리며
마음이 스치곤 했네
아주 작은 자갈돌들이 뒹구는
숲속의 하얀 오솔길
길섶의 보드라운 풀잎들이
우리들을 건드리며 간지럽히고
나는
난생 처음 사랑의 감미로움에 젖었다네
새로 피어나는 나뭇잎처럼 옷깃이 스치고
풀잎처럼 어깨가 닿고
꽃잎처럼 손길이 닿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몰래 손이 잡히었다네
아,
숨이 뚝 멎고
빙그르르 세상이 돌 때
다람쥐 한 마리가 얼른 길을 질러가네
따사롭게 젖어 퍼지는 세상의 온기여
새로 열리는 숲이여 새로 태어나는 사랑이여
서로 섞이는 숨결이여
여기는 어디인가
숲은 끝이 없고
길 또한 아름다워라
우리들의 사랑 또한 그러하리
걷다가, 처음 손잡고 걷다가
한 무더기 하얀 꽃 앞에서
당신은 나에게 꽃 따주며 웃었네 하얀 찔레꽃
오월의 숲에 갔었네
그 숲에 가서
나는 숲 가득 퍼지는 사랑의 빛으로
내 가슴 가득 채웠다네
찔레꽃 받아든 날의 사랑이여
이 세상 끝없는 사랑의 날들이여!
바람 불고 눈 내려도
우리들의 숲엔 잎 지는 날 없으리.
[007] 마른 수수밭 / 김신용
뼈만 앙상한 부처의 모습을 새기고 있는 것일까?
들판의 마른 수숫대가 바람에 서걱인다
말라 바스라져 가는 수수잎들, 그 녹슬고 무딘 잎들 각도(刻刀) 삼아
뼈만 앙상히 도드라질 때까지, 제 몸에 살 한 점 붙이지 않는 저 조각
무수한 뼈들이 엉켜 있는, 무수한 뼈들이 엉켜 아라베스크 같은 구도의 선(線)들을 새기고 있는
그 무늬, 무슨 안행(雁行) 같다
누구를 부르는 안타까운 손짓들 같기도 하다
그 뼈로 허공을 쳐, 그러나 끊임없이 나래를 쳐, 밤의 들판을 건너가는
끝 모를, 그 긴 행렬
저 뼈의, 안행(雁行)을 따라가면, 그 뼈로
움켜쥐고 싶었던 나라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단 하나의 고통만 남아 있어도, 제 몸에 살 한 점 남기지 않는
그 나라에, 나래 접을 수 있을까? 궁리하듯
들판의 마른 수수대가 바람에 서걱인다
익은 이삭들 모두 내미는 손들에게 주고
다만 뼈로 서서, 바람 불면 일제히 날갯짓을 하면서
[008] 사모 /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해야 할말이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잊혀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해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이미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해
[009]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010] 어디 우산 놓고 오듯 /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011] 말의 잠을 위하여 / 유안진
어떤 자장가도 부르지 마라, 쉴 참 없이 쏟아지는 소음이 되지 말고,
이산 저 산 돌돌아가며 한 생애 메아리칠 한마디로 태어나도록, 깊은
단잠 오래 오래 누려 재우고 싶어
잠을 자야 힘이 크는 말(言語)을 위하여 입천정에 거미줄 자욱하도록
길게 자거라, 冬眠으로 毒을 키우는 毒蛇처럼, 나방으로 날기 위해 날잠
자는 번데기처럼, 100년잠을 깊이 잔 숲속의 공주처럼, 왕자까지 불러
들인 그 마술의 잠을 빌어
한 백년만에 깨어나면, 빈 귀에 메아리 칠 絶命의 斷末魔같은, 못 잊을
한마디로 태어날 수 있을 듯, 입과 손이 沈默의 집, 고요의 집이 된다면,
寂寞의 집이 된다면.
[012] 아무도 모르겠지 1, 2, 3 / 김민홍
아무도 모르겠지
밤이면 내가 강가에 나가
은밀히 슬픔을 헹구고
돌아온다는 걸
하여 강물은 밤새
퍼렇게 뒤척이고
물고기들은 내 슬픔을 먹고
살찐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사람들의 눈빛이 흐려질 때마다
내가 조금씩 야위어 가는 걸
하여 내쓸쓸함이
몹쓸 병으로 익으면
다시 강가에 나가
소리죽여 내가 울고
투명한 내 눈물이
썩어흘러 바다에 닿으면
이윽고 해일이 일고
물고기들이 일제히 배 뒤집어
수군거린다는걸
끝내 아무도 모르겠지
아무도 모르겠지 2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내밀히 죽어가며
다시 태어난나는 걸
그대들 눈빛 속의 미세한 떨림도
감지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세 살때 입양된 그 아이가
처녀가 되어 다시 찾은 모국
그녀의 젖은 이국어(異國語) 속에 내가
막막히 침잠하며
다시 떠오른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언제나 벼랑 끝을 걸어왔듯
오래 묵혀 둔 비밀일수록
비밀이 없다는 걸
얼마나 긴 터널을 지나왔는지
터널 끝, 눈부신 노을을 보면
그래, 어떤 이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끝내 아무도 모르겠지
아무도 모르겠지 3
아무도 모르겠지
그대 눈빛이 흐려질수록
내 사랑 더욱 깊어진다는 걸
그대가 절망할수록
내 희망 점점 커간다는 걸
사실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무도 모르겠지
내 더럽고 치사한 외로움을
사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죄를
내가 파먹은 그대의 상처들을
피둥피둥 살찐 나의 철면피한 늙음을
결국 갚을 수 없는 부채들을
아무도 모르겠지
교묘하게 속여온 生
묵묵히 참아주었을 뿐
아무도 속아주지 않는다는 걸
사실은 나도 몰랐으니까
[013]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014] 그냥 살아야지 / 김현승
생각하면 할수록 흔들리일 뿐,
그냥 살아야지 ……
노래하면 노래할수록 멀어질 뿐,
그것도 그냥 살아야지 ……
사상(思想)은 언제나 배고프다,
또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냥 살아야지 ……
겨울에는 눈을 맞고
가을 밤엔 달을 보고
그런대로 이웃들과 어울리어 살아 왔다.
그냥 살고 말아야지 ……
그냥 살아야지,
쪼개 보면 쪼갤수록 사라져 버리는 것,
별들이 보석처럼 보이는 이 거리 ㅡ 이 땅에서
그냥 살아야지 ……
새 것 속엔 새 것이 없다,
새 것은 낡은 것의 꼬리를 물고
낡은 것은 또 새 것의 꼬리를 문다.
그냥 그냥 살아야지 ……
[015] 시, 부질없는 시 /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정말 시로 무엇을 할 수가 있으랴?
그냥 홀로 아름다우면 되는 것일까?
그러면 들꽃하고는 어떻게 되는가?
아, 부질없어라. 시쓰는 것.
내리는 눈보다도, 몰아치는 바람보다도
감동적이지 못한 우리들의 시들,
이 문명의 찌꺼기들, 정말 부질없어라.
[016]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 박남준
먼 길을 걸어서도 당신을 볼 수 없어요
새들은 돌아갈 집을 찾아 갈숲 새로 떠나는데
가고 오는 그 모두에 눈시울 붉혀가며
어둔 밤까지 비어가는 길이란 길을 서성거렸습니다
이 길도 아닙니까 당신께로 가는 걸음
차라리 세상의 길이란 길가에 나무가 되어 섰습니다.
[017] 바라춤 / 신석초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 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刑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 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019] 달 보는 시인 / 이생진
__만제도 79
수근거린다
"그 사람은 시인이라 하던데"
하루는 장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가
국도(菊島) 저 너머 수평선을 보고
하루는 물생산 꼭대기에 올라가
염소랑 바다를 보는데 염소 같더라구
하루는 풀숲을 헤치고 등대에 올라가
등대 밑에서 바다를 보는데 등대 같더라구
밤엔 선착장에 나와 땅바닥에 누워 별을 보는데
별 같더라구
혹시 사별한 사람 아닌가
혹시 짤린 사람 아닌가
혹시 자살 기도하는 사람 아닌가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목사님께 물어 봤대나
그랬더니 목사님 말이
"시인이란 시래기 같은 사람이지만
눈 하나는 수정같이 맑다"고
다음 날 마을 여자들은 시인의 눈을 보려고
물 길러 가서 마주친 시인의 눈을 보다가
물을 엎질렀대나
[020] 물의 나라에서 / 이성복
1
물 속에 잠든 풀잎
한번 발 내리며
영원히 무너지는
물방울
작은 물이 큰 물
만나는 감격
잠깐 번지는
감격
흐르는 물과 내리는 물의
서로 몸 바꾸기
그대가 물의 발이라면 나는 물의 발가락
그대가 물의 鍾이라면 물의 分子와 分子 사이를
헤집고 밀치며 살 부비는 나는 물의 鍾소리
그대가 물의 입이라면 벌어진 물의 입이라면
나는 하늘에 땅을 잇는 물의 울음
오, 그대가 물의 일그러진 입이라면
2
풀잎 위에 구르는 물방울
풀줄기를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누르는 물방울
맨발로 지우면 맨발에
맺히는 물방울
눈 감으면 마음에
맺히는 물방울
마음 기울면
흘러내리는 물방울
제 옆의 물방울에 어리는
다른 물방울의 얼굴
제 옆의 물방울 걸리는
다른 물방울의 목소리
맨발로 지우면
날개 없는 방아깨비
뛰는 연습을 하고
맨발로 지우면
네 눈은 팍,
흩어져 흐르고
3
누가 물 위를 지나가면
물의 목소리
누가 풀잎 흔들면
풀빛 마음 흔들려
누가 거기 있어?
눈초리, 목마른 눈초리
누가 누구를 흔든다
...안개...
누가 나를 흔든다
풀잎 사이
물방울,
떠 있는
[021] 동천(冬天)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022] 여자라는 나무 /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너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고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023] 유 리 창 / 정 지 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024]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025] 못 생긴 것이 더 / 이성선
잘 못 쓴 시가 더
마음에 들 때가 있다
아내 얼굴이
가까이 내 곁에 있듯이
완벽하지 못한
저 비뚜른 조선 자기
내 곁에서 너는
부끄러워 떠나지 못한다.
[026] 과일가게 앞에서 / 박재삼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 냄새에 홀려
살연애(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027]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028] 산 도적을 찾아서 / 신달자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
문정희 시인이
신선생의 약은 딱 하나
산 도적 같은 놈이
확 덮쳐 안아 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 그것도 좋지
나는 산 도적을 찾아
내일은 광화문을 압구정동을
눈웃음치며 어슬렁거려 봐야지
그러나 문시인
높은 빌딩의 엘리베이터나
지하실에서 만나는
기린 목의 얼굴 하얀 사내들 속에
산 도적이 남아 있나 몰라
집 단속은 꼼꼼히 챙기고
밖에서는 아무도 몰래
어쩌구 저쩌구 하고 싶은
속 다르고 겉 다른 남자들 속에
그래도 어딘가 산도적이 숨어 있을까
새 천년의 밀림 속에
밤새 우려 낸 것은
숨은 눈물의 진한 다짐인가
눈부신 하얀 피로
오래 식지 않고 조용히 끓는
설렁탕 한그릇
[029]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 박 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030] 내가 읽고 또 읽은 너의 몸 / 이선영
너의 몸은 단 하나가 아니다
너의 몸이 네 마음 갈래처럼 여러 줄기라 해도
나는 내 두 눈에 네 몸을 다 주워담는다
너의 몸을 이뤄낸 가느다란 뼈 하나까지도
그러나 문득 보일 듯 말 듯 내 눈이 놓친 네 몸 깊은 곳
아주 작고 검은 점들을 보게 된다, 네 오래 간직한 상처
내가 아직 읽지 못했고, 끝내 다 읽을 수도 없을
너는 두꺼운 한권의 비밀!
나의 눈 바깥에 있는 또다른 너
너의 시작이 그랬듯이 뿔뿔이 흩어질 것만 같은 네 몸에
내 두 눈을 온통 쏠리게 하는
때로 네 몸 하나가 내 두 눈의 천체(天體)가 된다.
이선영 시집<<일찍 늙으매 꽃꿈>>(창작과비평사)
[031]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수 있을까
그곳에서 �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어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032] 한 알의 사과 속에는 / 구상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녹는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033] 초토(焦土)의 시 / 구상
__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언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 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금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034]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 / 이성복
어제는 종일 걸었다 해가 땅에 꺼지도록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다
길에서 창녀들이 가로막았다
어쩌면 일이 생각하는 만큼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가슴은 여러개로 分家하여 떼지어 날아갔다
그것들이야 먼데 계시는
내 어머니에게로 날아갈 테지만
젖은 불빛이 뺨에 흘렀다
날아가고 싶었다, 다만, 까닭을 알 수 없이
[035] 단추 하나의 문제 / 정진규
나와 내통하던
열 사람의 여자와도
이 가을엔 헤어지기 위하여
모두 열번을 버리고
오직 한번을 얻고자 했지만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나의 중앙이
다섯 개의 내 질서가
모두 무너져 보였다
그것이 문제다
그것이 문제다
돌아와 한밤엔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들의
맨 마지막
혼자서 뛰어가는 뒤떨어진
발자국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나는 혼자서 향방을 바꿀 수 없었다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036]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037] 우리동네 목사님 /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038] 노인들 / 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
[039]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메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년 혹은 백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040] 절과 나무 / 오 규 원
나무 몇 그루가 묵묵히 가지 속에
자기 몸을 밀어넣고 있다
그 나무들 위에 절(寺)이 한 채 얹혀 있다
나무의 가지 끝까지 올라간 물이
나무에서 절 안으로 길을 내고 있는지
가지가 닿은 벽의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다
양광은 하늘에 가득하고
부처는 절 안에 있고
사람은 절 밖에서 나무에 잡혀 있다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041]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042] 아내의 얼굴 / 李 誠
아름다운 금잔화꽃밭을
무거운 수레가 깊은
자국을 남기며 지나갔다
[043] 야생의 꽃 / 허만하
의미에서 풀려난 소리는 비로소 아름답다.
숲 속에서 새의 지저귐 소리 들어보라.
물에 비친 가지 끝 섬세한 떨림을 보라.
의미는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는다.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꽃나무.
지는 꽃잎은 소리를 가지지 않는다.
침묵의 배후에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들녘을 보라.
사람의 시선이 머문 적 없는 야생의 꽃들이 있다.
흰 색 가운데서 흰 꽃잎은 희지 않은 것 가운데서 흰 것보다 본질적으로 희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흰 꽃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이름 없는 들꽃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의 꽃가루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을 보라. 목숨은 역사 이후의 다른 별까지 날아간다.
지구가 사라진 뒤의 낯선 천체 위에서 꽃들은 바람도 없이 온몸을 흔들 것이다.
불멸의 언어처럼 인류를 추억할 것이다
[044]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 이기철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무성하던 식욕은 어디로 갈까,
성욕은 어디로 사라질까,
추억이 내려놓은 저 형형색색의 길을
누구가 제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걸어갈까,
비와 구름과 번개와 검은 밤이
윤회처럼 돌아나간 창을 달고 집들은 서 있다.
문은 오늘도 습관처럼 한 가족을 받아들인다.
이제 늙어서 햇빛만 쬐고 있는 건물들
길과 정원들은 언제나 예절 바르고
집들은 항상 단정하고 공손하다.
그 바깥에 주둔군처럼 머물고 있는 외설스러운 빌딩들과 간판들
인생이라는 수신자 없는 우편 행랑을 지고
내 저 길을 참 오래 걸어왔다.
내일은 또 누가 새로운 식욕을 되질하며 저 길을 걸어갈까,
앞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지우면서 내 이 길을 걸어왔으니
함께 선 나무보다 혼자 선 나무가 아름다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내 풍경 속에 천 번은 서 있었으니
생은 왜 혼자 먹는 저녁밥 같은가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045]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꺽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046] 갈대밭에서 / 박재삼
갈대밭에 오면
늘 인생의 변두리에 섰다는
느낌밖에는 없어라.
하늘 복판을 여전히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날지만
쓸쓸한 것은 밀리어
이 근처에만 치우쳐 있구나.
사랑이여
나는 왜 그 간단한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대가 없는 지금에사
울먹이면서, 아, 흐느끼면서
누구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할 소리로
몸채 징소리 같은 것을 뱉나니.
[048] 구슬픈 육체 / 김수영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땀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049] 세월이 가면 / 박인환 (1926-1956)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묻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050]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 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 같이
언제나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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