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모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이성부 시)

푸른솔♬ 2007. 12. 11. 16:57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이 성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데서 보면 크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을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아니다 저어기 저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 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져서 나를 가두고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 년 땀 흘려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예순 넘어서야 깨닫는 이 놀라움이라니

 

몇 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 하고

 

몇 번이나 더 작아져버린 나는 험한 날등 넘어야 하나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3] -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창작과 비평사) 중에서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산(山)이 악(岳)이요, 악(岳)이 산(山)인데 설악(雪岳)과 송악(松岳)을 설악산(雪岳山), 송악산(松岳山)이라고 부른다. 동음반복이다. 갑골문을 보면 악(岳)은 겹겹의 산을 상형(像形)한 것이다. 윗부분의 구(丘)는 언덕을 훈(訓)으로 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작은 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산 뒤의 산이 작아보인다고 이런 글자를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뒷산이 더 클수도 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운 거리가 같지 않기 때문이라"[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꼭 산(山)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전반에 적용될 수 있겠다. 예컨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가까이 있는 작은 주먹(불의) 때문에 멀리 있는 법(정의)은 아무런 권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다면 견강부회(會)일까. 다산 정약용이 일곱 살 때 지었다는 시인데, 악(岳)을 보고 떠올린 기발한 시상이다.

 

 

*백화산 :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 경계에 솟은 산. 해발 1065m. 문경지방의 백두대간은 속리산으로부터, 대야산, 희양산, 백화산, 조령산, 대미산, 황장산으로 이어져 있다. 백화산의 정상에 서면 희양산, 운달산, 주흘산이 보이고 황학산 쪽으로 가다보면 암봉에서 세미클라이밍을 즐길 수 있다. 같은 이름의 영동(상주) 백화산(한성봉, 933m)과 충남 태안의 백화산(284m)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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