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영알택리지

기행시인 배성동의 영남알프스 택리지 <4> 하늘길을 오르는 사다리 '선짐재'

푸른솔♬ 2012. 5. 22. 18:54

벌벌 기도록 가파른 고갯길, 굽이굽이 눈물로 땀으로 적셔

 

간월산 북능의 일흔아홉 고갯길 선짐재를 '부산댁'이 오르고 있다. 고로쇠 작목을 하던 내리정 대추나무집의 '부산댁'. 귀양살이 같은 배내골에서 세 번을 도망갈 생각을 한 '부산댁'은 인간미가 절절 흘렀다.

 

 

- 등짐 지고 서서 쉰다는 선짐재
- 첫 닭소리에 집 나서 장터로
- 귀갓길엔 호롱불 켜서 들고
- 일흔 아홉개 고개를 돌고 돌아

- 멧돼지와 발맞추는 배냇골 사람
- 나쁜 교통·교육 환경에 고통
- 귀양살이와 진배없는 척박한 삶


■이삿짐을 지고 간월산 보릿고개를 넘은 피난민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7년 여름, 피난민 부부가 간월산을 오르고 있었다. 부산 감전동 피난촌에서 장로에 오른 지 이태만이었다. 등짐을 진 채로 쉰다는 '선짐재'는 하도 가팔라 기어오르다시피 해야 했고, 땀이 멱을 감는 듯했다. 게딱지 움막에서 챙겨온 무거운 무쇠솥 안에는 된장 단지와 세간 꾸러미가 들어 있어 다리는 후들거렸다.

이리 봐도 산, 저리 봐도 산, 넓디넓은 세상에서 하늘 이사라니. 불여우에 홀린 듯 앞서 가는 서방을 따라가던 '부산댁'은 된 숨을 몰아쉬었다. 암흑천지에서 살아갈 앞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머리에 인 보따리를 당장 천질바위 아래로 내던지고 싶었다. 귀양살이와 진배없는 배내골로 내몰리는 설움에 복 바쳐 울고 또 울었다.

잠꼬대 같은 이야기이지만 55년 전에 간월산 '선짐재'로 이삿짐을 옮겼던 황광수(84세) 씨 부부가 겪었던 일이다. 황 씨 부부는 험하기로 호가 난 간월산(1083m) 북능의 선짐재를 넘어 배내골로 이삿짐을 옮겼다. 아무도 발 디디지 못할 산간오지에 막상 도착해보니 사방 오십 리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손바닥만 한 마을은 난리 통에 쑥대밭이 되었고, 빨치산 토벌을 위해 휘발유를 통째로 뿌려 불을 지른 산은 민둥산이었다. 보리 흉년 때라 소나무 껍질을 벗겼고, 칡뿌리를 캐 먹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징역살이였다.

■육지의 보트 피플, 배내골 주민

   
선짐재 잿마루의 돌무더기. 도시락과 호롱불을 보관해 두었던 장소이다.

나쁜 교통과 교육 환경이 문제였다. 장터를 나가려면 태산 같은 간월산을 넘어 한나절을 꼬박 걸어야 했고, 중학생 아이는 외지에 자취를 시켜야 했다. 외지인들은 '멧돼지와 발맞추고 사는 배내골 사람에게는 딸을 안 준다'며 얕잡아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 태극교 신도 마흔아홉 가구가 황 씨를 뒤따라 들어왔다. 도시의 떠돌이들도 숯을 굽는 막장일을 찾아 몰려들었다. 반미치광이가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렸지만 먹고 살기에 절박한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태극교 교인끼리 몰래 모인다고 하여 '빨갱이교'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흘렀다. 떠돌이 시인은 황 씨 부부가 이삿짐을 지고 넘었다는 간월산 '선짐재'를 넘어 배내골을 찾아 들어갔다. 상북 간월마을에서 천질바위를 거쳐 간월산을 넘는 잿길은 그런대로 온전했다. 그러나 잿마루를 넘어 내리정으로 난 옛길은 1980년대 임도공사로 사라지고 없었다.

길 없는 길의 수풀을 헤치고 내리정 계곡으로 파고들었다. 마침 내리정 계곡에서 고로쇠 작목을 하던 할머니가 낯선 사내에게 고로쇠 물을 한 바가지 권했다. "고로쇠가 아니라 골병수요. 입춘에는 없어 못 팔고, 춘분 때는 물이 많아 못 팔아요." 고로쇠 물은 달짝지근하고 시원했다. 고로쇠 작목을 거들던 노인네가 걸어왔다. 선량함이 배어있는 두 노인네 분이 바로 '선짐재'로 이삿짐을 나른 황 씨 부부였다. 혈기왕성하던 사내는 어느덧 호미 허리로 구부러져 있었다. 손발이 터지도록 땅을 일구어온 황 씨는 "너무 힘든 일을 하느라 허리가 요렇케롬 구부러졌다"고 말했다.

노부부는 배내골에서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칡뿌리를 캐 먹으면서 보리 흉년을 넘긴 암흑시대를 자식들에게 남기기 위해 늘그막에 한글을 배운다는 '부산댁'은 "귀양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부산댁'이 목이 멘 목소리를 할 때마다 황 씨는 꿀 먹은 벙어리인 양 먼 산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오. 천날 만날 그 장단 아니겠어요? 이 암흑천지에서 도망치려고 세 번을 보따리를 쌌어요." 귀양살이와 진배없이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떠돌이 시인을 만난 것만으로 목이 메는 모양이었다.

■호롱불 들고 넘던 일흔아홉 고개 '선짐재'

산짐승 울어대는 새벽녘. 첫닭이 울자 호롱불을 든 배내골 아낙들이 '선짐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에 콩 보따리를 이거나, 젖먹이를 업은 아낙도 있었다. 아낙들이 잿마루에 오를 때쯤이면 날이 새었다. 꼭두새벽부터 나온 아낙들은 '선짐이' 잿마루 돌무더기 주변에 둘러앉아 일출을 감상하며 아침밥을 먹었다. 일출은 장관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은 불등처럼 훨훨 타올랐고, 산 아래 내(川)는 붉게 물들었다.

잿마루를 넘나들 때마다 하나 둘 던진 돌무더기는 물목 보관소였다.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아낙들은 내다 팔 물목 외에는 죄다 돌 더미 속에 두고 장으로 떠났다. 눈썹마저 빼놓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돌아와서 먹을 주먹밥(도시락)은 초베기에 싸서 넣고, 호롱불로 쓸 석유병은 속케(솜)를 야물게 틀어막아 돌무더기 속에 보관해 두었다.

"도시락 별거 없어. 콩고물이나 소금물 묻힌 꽁보리밥을 삼베에 쌌어." 내리정에 사는 이지춘(78세) 할머니가 한 말이었다. 이 할머니는 선짐잿마루를 가리키며 "저 하늘만디에 오르면 하늘이 노랗더라"며 엄살을 떨곤 했다. 장을 본 아낙들이 국수로 허기를 달래고 돌아올 무렵이면 간월산으로 해가 그렁그렁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월산으로 설핏하게 기우는 해는 예로부터 헌양팔경(獻陽八景)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옛 선인들은 화살을 쏘아 천 개의 달 중에서 한 개의 달을 맞추었고, 물그릇에 달을 담아 마시기도 했다.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를 떠받친 천질바위

집으로 돌아오면서 올려다본 간월산은 까마득했다. 아낙들은 보자기에 돌을 한두 개 싸들고 다시 '선짐재'를 올랐다. 장을 오가는 데만 꼬박 한나절이 걸린 아낙들은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쓰러질 듯 오르다가 잿마루 아래에 우뚝 서 있는 천질바위(千丈巖) 위에 공들여 싸온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빌었다.

영축산 구룡(九龍) 중에 북방으로 도망치던 한 마리가 부딪쳐 눈먼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천질바위에 돌을 던져 한 번 만에 올라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날이 저물 즘에서야 '선짐재' 잿마루에 도착한 아낙들은 돌 더미에 넣어둔 호롱불을 꺼내 비추며 내려왔다. 첫닭 울 때 나선 장 길이 온 종일 걸린 것이다.

돌아다니는데 제법 이력이 난 떠돌이 시인이 걸어보아도 '선짐재'는 까무러칠 만큼 힘들었다. 일흔아홉 개의 아리랑고갯길과 가파른 비탈을 돌고 돌다 보면 '하늘이 노랗더라'는 아낙들의 한탄이 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힘들게 오른 만큼 오장육부를 말끔히 씻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옛길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꼬불꼬불한 고갯길은 산을 오르는 힘이 되어 준다. 예컨대 일흔아홉 고갯길 자체가 하늘길을 오르는 사다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