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영알택리지

기행시인 배성동의 영남알프스 택리지 <1> 하늘억새길

푸른솔♬ 2012. 5. 22. 18:37

자연·사람·이야기 품은 '천하명산'뒤안길

 

   

영남알프스의 가을은 억새로 대표된다. 사자평과 신불평원 두 곳의 드넓은 억새밭은 전국적인 '스테디셀러'라고 할만한 곳이다. 사진은 사자평 억새밭. 국제신문DB

 

 

- 가지산·간월산·신불산 등 명산 이어져
- 장꾼들 호랑이·늑대 등 짐승 무서워도 먹고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넘나들어
- 임진왜란·한국전쟁 역사 오롯이 간직


 

- 1㎞ 넘는 산등길 엮은 '하늘억새길', 지상서 '가장 걷고 싶은 길'로 꼽혀

- 지금은 역사에 묻히고 개발에 시름


가지산과 영축산, 재약산 등 명산을 품고 있는 영남알프스는 부산과 울산 경남 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산행지이자 휴식과 놀이를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런 영남알프스지만 아직 그 속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기행시인 배성동의 발길을 따라 숨은 오지마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옛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간다.


 

   
"추풍령 이남 사람 치고 울산 소금 안 먹는 사람 없었다." 영남알프스 일대를 떠돌며 만고풍상을 겪은 '언양 장꾼' 한천출(96) 씨가 한 말이다. 하늘을 찌르는 영남알프스 태산을 넘나들었던 한 씨는 떠돌이 시인인 필자에게 채꾼(길잡이) 노릇을 해 준 분이다.

부산 소금배가 낙동강 물길을 따라 삼랑진과 안동을 거슬러 올라갔다면, 동해에서 생산한 소금을 등에 진 소금장수들은 영남알프스를 넘어 밀양, 청도, 대구, 추풍령까지 수 백 리를 나갔다. 영남알프스 태산을 택한 이유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요즘이야 도로가 나고 터널이 생겨 단숨에 넘을 수 있지만 이전에는 100㎏이 넘는 소금 가마니를 짊어지고 올랐었다. 까무러칠 정도로 힘들 때면 짐을 풀고 잠시 쉬곤 했던 곳이 표충사 뒷산에 있는 '소금쟁이 새미'이다.

소금장수뿐 아니라 물건을 지고 직접 마을을 돌며 행상을 하는 보부상들과 소쿠리장수, 어물장수, 인삼장수를 비롯한 장꾼들도 험하기로 호가 난 영남알프스 태산을 죽기 살기로 걸어서 넘었다. 호랑이와 늑대가 득실거려 일곱 사람이 모여야 출발을 했고, 까마득한 재를 넘을 때면 너나없이 오줌을 질금질금 쌌다. 그들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목기를 만들기 위해 임시로 지은 산중 목기막이나, 나무 바가지를 만드는 주계덤, 화전민이 사는 사자평 개딱지 움막도 마다치 않았다.

■지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산악길 '하늘억새길'

장꾼이나 산간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 넘나들던 영남알프스 옛길을 탐방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길이 근래에 새로이 만들어진 '하늘억새길'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악길에 만경창파의 억새를 두고 지은 이름으로 울주 고을과 양산 고을에서 배내골로 넘어가는 다섯 개의 재인 '배내오재(梨川五嶺)'와 맞물려 있다. '하늘억새길'은 가지산 구름재에서 영축산 백발등을 돌아 능동산까지 부챗살처럼 뻗어있는 1000m가 넘는 긴 산등길이다.

떠돌이 시인은 영남알프스의 새로운 로드명인 '하늘억새길' 전(全) 구간을 걸신처럼 돌아다녔다. 영남알프스의 천하명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하늘억새길'에 올라서면 사방 백 리가 보여, 지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산악길로 꼽힌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매야 보배라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재약산, 천황산을 잇는 보석 같은 산군이 꿰매져 있음을 직접 볼 수 있다. 배내골을 중간에 두고 소쿠리 형태의 산등을 원점회귀로 한 바퀴 돌면서 산군을 만끽할 수가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흑백 세상에 내린 영남알프스의 택리지는 놀라운 세계이다. 자연과 인간의 발길이 창조한 옛길을 걸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첩첩산중의 통로였던 배내오재, 주름진 골짜기마다 실뱀 같은 길이 박힌 배내구곡, 등짐을 지고 오르던 아리랑고갯길, 산간오지의 무중력 공간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구절양장 옛길을 아니온 듯 걸어보시라. 어깨높이로 자란 '억새밭 길'을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날아간다. 통도사에서 표충사로 이어지는 '선사 길'을 묵언으로 걸어보시라. 걷기만 해도 도통한다. 항일 의병과 천주교 순교자가 걷던 '통곡의 길', 한국전쟁 당시에 빨치산이 행군하던 '고난의 길', 접시등불을 켜기 위해 상어기름을 구하러 나서던 '장마중 길'을 무작정 걸어보시라.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야말로 산을 오르는 힘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옛길을 알고 나서 새 길을 내어야 하는데, '하늘억새길'은 억지로 구슬을 꿰맨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멀쩡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인공전망대를 만들고 옛길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목재 데크 계단이나 침목 포장으로 노면을 인공적으로 정비했다. 그동안 강(江)에서 재미를 본 지자체들이 영남알프스를 산악 관광개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난개발을 일삼는 바람에 영남의 허파는 서서히 자정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규모 행사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줄만 알았지 산과 동물, 식생에 대한 배려는 손톱만큼도 없다.

내친김에 '하늘억새길' 시작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점은 걸어서 2시간을 올라가야 하는 해발 900m 간월재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축지법으로 신출귀몰하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는 데도 간월재가 시작점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설령 '하늘억새길' 전 구간을 한 바퀴 돌아 간월재로 원점회귀 한다손 치더라도 다시 하산해야 하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은 소 닭 보듯 무심하다.

■'불멸의 산' 영남알프스는 살아있다

떠돌이 시인은 야생동물에 희생된 고라니를 백발등 선짐재에서 발견한 일이 있었다. 내장을 고스란히 내어주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라니 시체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시체 주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고 여기저기에는 흩어진 고라니의 털이 보였다. 핏자국을 따라 으쓱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울부짖는 야생동물의 괴성에 소름이 끼쳐 오싹했다. 잠꼬대 같은 이야기이지만 영남알프스 일대를 떠돌다 보면 야생이 전하는 발신음을 듣곤 한다. 그 발신음은 영남알프스를 함부로 파괴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보복을 가하겠다는 야생의 경고음이다.

역사적으로 영남알프스는 강인한 산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난공불락의 산이었고, 억압받는 민중과 조국을 잃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분노로 입산한 산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빨치산을 토벌하던 비행기가 온 산을 날아다니며 휘발유를 통째로 부어 불을 지른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상처만 있고 영광은 없었으나, 스스로 일어서 불멸의 산이다.

■고자가 처가 드나들 듯한 천하명산 옛길

   
범 없는 골에 토끼가 왕이라고, 떠돌이 시인은 고자가 처가 드나들 듯이 뻔질나게 영남알프스를 드나들었다. 바람과 억새가 주인인 영남알프스는 호락호락한 산이 아니다. 안개 바다에 빠져 길을 잃게 되면 자칫 벼랑길로 향할 수 있다. 길이 있는 곳이면 사람이 사는 줄 알고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한 번은 멋모르고 '저승골'을 갔다가 '저승사자의 저주'를 받아 어깨를 다쳐 후회막급을 하기도 했다.

무수한 사연을 몰고 다니던 천하명산 영남알프스의 옛길은 이제 하나 둘 낙엽 아래에 묻혀가고 있다. 내비게이션에 등록되지 않고, 지도에도 사라진 역사의 뒤안길을 떠돌이 시인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