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행일지

순천 조계산(曹溪山, 884m)(2008.3.8)

푸른솔♬ 2008. 3. 15. 22:11

[코스] 선암사 매표소(10:08)-->승선교-->삼인당-->선암사-->대각암-->조계산 장군봉(884m)(11:50)-->헬기장(865m)-->장밭골 삼거리-->843봉-->연산봉 삼거리-->연산봉(851m)(13:34)-->송광 굴목재(665m)-->홍골-->토다리 삼거리-->비룡폭포-->홍골입구-->송광사(14:38)-->매표소(15:00)(*)

 

[날씨] 구름 약간. 포근함

 

 

 

#1. 선암사 매표소 앞

 

 

 

 

 

 

#2.

 

 

 

 

 

 

#3. 선암사 안내도

 

 

 

 

 

 

#4. 조계산 등산안내도

 

 

 

 

 

 

#5. 조계산선암사 표석

 

 

 

 

 

 

#6. 부도탑

 

 

 

 

 

 

#7. 강선루(降仙樓)

 

 

 

 

 

 

#8. 강선루(降仙樓)

 

 

 

 

 

 

#9. 강선루(降仙樓) 편액

 

 

 

 

 

 

#10.

 

 

 

 

 

 

#11. 삼인당

 

 

 

 

 

 

#12. 삼인당에서 바라본 강선루

 

 

 

 

 

 

#13.

 

 

 

 

 

 

#14.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15. 조계산 선암사 편액

 

[선암사(仙巖寺)] 
전남 순천시 승주읍(昇州邑)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 
《선암사사적기(仙巖寺寺蹟記)》에 따르면 542년(진흥왕 3) 아도(阿道)가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동, 요(寮) 25동,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다.

주요문화재로는 보물 제395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대웅전은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16. 범종루.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17. 범종루

 

 

 

 

 

 

#18. 선암사 경내

 

 

 

 

 

 

#19. 선암사 경내

 

 

 

 

 

 

 

 

#20. 선암사 대웅전

 

 

 

 

 

 

#21. 삼층석탑(보물 395호)

 

...선암사의 진입 공간 부분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첫 건물인 강선루(降仙樓)에서부터는 가파른 지형이다. 이곳은 그다지 넓지도 않다. 따라서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선암사의 건물들이 좌우 방향으로는 다소 넓으나 전후 방향으로 조밀한 것은 그 까닭이다. 이러한 단들은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분절하여 위계성을 주며 시각적으로는 전개되고 패쇄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 구성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공간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여 진입 공간, 과정적 공간, 청정 공간, 매개 공간, 주공간, 부공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선암사에 있어서는 이러한 고려가 아주 우수하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긴데, 두 번을 휘감고 돌아가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梵鐘樓)가 압도하듯 다가온다. 그냥 서서 자나가면 호령이라도 할 것 같다. 이를 누하진입(樓下進入)이라고 한다. 전라도 지방의 사찰에는 이러한 누하진입이 드물다.

대웅전 앞뜰을 그다지 넓지 않다. 쌍탑(雙塔)을 격에 맞게 두었고 앞에는 길 다란 강당을, 좌우에는 요사와 선방을 위치시켰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조선후기의 사찰가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이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 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영역과 축선이다.사찰의 규모가 크고 불전의 수가 많으니 주축 외에도 여러 개의 축을 설정하여 둘 이상의 주불전이나 영역을 통합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주축 상에 위치한 대웅전 영역의 건물군 외에도 원통전 영역, 응진당 영역, 각황전(覺皇殿) 영역 등 경내 전체를 네 개의 영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대웅전 영역의 중심축에서 약간씩 비켜 서 있다.  

 

특히 이러한 소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축대로 쌓여진 각각의 서로 다른 단 위에 펼쳐져 있다. 선암사는 예부터 6방(房)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여기서 6방이라하면 상선원.하선원.강원.정읍원.도감원.염불원을 일컫는다.

상선원은 지금의 칠전으로 하선원인 심검당에서 어느정도 수행을 한 납자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하선원은 심검당으로 수행납자들이 처음 선방에 들어와서 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강원은 천불전으로 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는 공간이다. 정읍원은 무우전으로 밀교계통의 다라니를 외우는 공간이다.

도감원은 창파당으로 절의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염불원은 설선당으로 아미타불을 계속해서 독송하는 공간이다. 이런 6방 살림은 예불, 공양 등을 따로 분리하여 각각의 독립된 공간에서 독자적인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

 

선암사 가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세 가지가가 없다(三無)는 것이다.
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굳이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주련인데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는 주련이 기둥에 붙어 있는데 선암사는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틀리다)라고 하여서 곧  깨달으면 말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서 주련을 달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22. 뒤깐(해우소, 解憂所)

 

 

 

선 암 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23.

 

 

 

 

 

 

#24. 대각암 오르는 길섶 왼편에 있는 마애불

 

 

 

 

 

 

#25. 대각암

 

 

 

 

 

 

#26. 너덜길을 올라 잠깐 쉬고...

 

 

 

 

 

 

#27. 세 갈래길 쉼터에 옹달샘이 목 마른 길손을 기다리네

 

 

 

 

 

 

#28. 장군봉의 이정표

 

 

 

 

 

 

#29. 장군봉에서 내려다본 보리밥집 일대

 

 

 

 

 

 

#30. 조계산 장군봉 정상석

 

 [조계산(曹溪山)]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주암면(住岩面) 일대에 걸쳐 있는 산. 
높이 884m이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솟아 있다. 고온다습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렸으며,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피아골·홍골 등의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폭포·약수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조계산이란 산명은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그 조계(曹溪)와 한자 표기와 의미가 같다. 조계란 원래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의 별호로서,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 산에 혜능의 수행법을 따르는 수선사(修禪社)를 열면서 산이름이 송광산에서 조계산이 되었고, 그 후 이 산 기슭의 송광사는 오랫동안 조계종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동쪽의 계곡 물은 이사천(伊沙川), 서쪽의 계곡 물은 송광천으로 흘러드는데, 특히 비룡폭포가 유명하다. 서쪽 기슭에는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僧寶寺刹)인 송광사(松廣寺)가 자리한다. 이 곳에는 목조삼존불감(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국보 56) 등의 국보와 12점의 보물, 8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동쪽 기슭에는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이 곳에도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 아치형 승선교(昇仙橋:보물 400) 등 문화재가 많다. 그 밖에 송광사의 곱향나무(일명 쌍향수:천연기념물 88), 승주읍 평중리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36) 등이 유명하고, 선암사의 고로쇠나무 수액과 송광사 입구의 산채정식 등이 먹을거리로 꼽힌다.

산 일대의 수종이 다양해 산 전체가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31. 상사댐

 

 

 

 

 

 

#32. 장군봉에서 한 컷.

 

 

 

 

 

 

#33.

 

 

 

 

 

 

#34.

 

 

 

 

 

 

#35.

 

 

 

 

 

 

#36.

 

 

 

 

 

 

#37. 장밭골 삼거리 이정표

 

 

 

 

 

 

#38. 연산봉에서 바라본 장군봉.

 

 ...현재 연산봉이라 불리는 이 봉우리는 옛날 송광사 쪽에서는 효령봉(호령봉)이라고 불렀으며, 조계산과 인접한 송광면의 노인들은 지금도 효령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효령봉(연산봉)은 장군봉과 함께 동서로 마주보는 조계산의 대표적인 두 봉우리 중의 하나이며 높이는 881m이다. 고려말 조계산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선암사 쪽에 있는 장군봉은 청량산으로, 수선사(송광사) 쪽에 있는 효령봉은 송광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9.

 

 

 

 

 

 

#40. 연산봉에서 바라본 능선

 

 

 

 

 

 

#41. 연산봉의 정상은 넓은 헬기장이다.

 

 

 

 

 

 

#42. 연산봉에서 바라본 지나운 능선

 

 

 

 

 

 

#43. 송광사 굴목재

 

 

 

 

 

 

#44. 걸친 바위

 

...[걸친 바위] 전설

오랜 옛날 조계산의 호(효)령봉 피아골에는 스님들을 시기하는 마군(魔軍)과 도승(道僧)이 이웃하여 살았는데, 마군은 도승을 �아내고 자리를 모두 차지하려고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대결을 벌여 도승을 눌러 보려하였다. 그러나 송광사와 선암사를 수시로 오고 가는 스님들 때문에 마음놓고 해 볼 수가 없어서 궁리 끝에 두 절을 왕래하는 길을 막아버리면 왕래가 끊겨서 자연히 사이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이 난 골짜기를 향해 산체만한 바위를 굴렸다.

도승은 큰 일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자그맣고 재빠르게 생긴 괸돌에게 말해서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앞질러가서 반드시 가로막아라고 말했다. 주먹만한 괸돌에게 중얼거리는 도승을 마군이 비웃고 있을 때 큰 바위는 무섭게 골짜기로 굴러내려갔다. 다행히도 괸돌은 바위가 내놓은 길을 따라가서 거리를 점점 좁혔는데, 바위가 길을 가로막기 직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몸을 날렸고, 그 때문에 부딪히고 깨어져서 작아진 바위는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이로 인해 마군은 �겨나고 말았으며, 송광사와 선암사 스님들은 여전히 사이좋게 왕래를 했으니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괸돌에 걸린 바위, 즉 "걸친 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45.

 

 

 

 

 

 

#46.

 

 [송광사(松廣寺)]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溪山) 서쪽에 있는 사찰.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 때까지는 송광산이라고 했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峰)·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國師殿:국보 56)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90), 경질(經帙:보물 134), 경패(經牌:보물 175),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204),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보물 207), 하사당(下舍堂:보물 263), 약사전(藥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보물 572)가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에 있다.
 
 

 

 

 

 

#47. 송광사 경내

 

 

 

 

 

 

#48. 송광사 대웅전. "대웅보전' 편액의 글씨는 일중 김충현의 작품이다.

 

 

 

 

 

 

#49. 송광사 범종루

 

 

 

 

 

 

#50.

 

 

 

 

 

 

#51. 송광사 구시

 

...[송광사의 세가지 명물]

1. 비사리 구시
국사전 한 켠에 놓여 있는 '비사리 구시'는 우선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1724년 남원 세전골에 있었던 큰 싸리나무가 쓰러지자 이것을 가공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대중의 밥을 담아 두었던 것으로 쌀  7가마분(4천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2. 능견난사
절의 음식을 담아 내는 일종의 그릇(사리)인 '능견난사'는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수공예품으로 그 정교함이 돋보인다.

 

3. 쌍향수
곱향나무로 불리는 송광사의 명물 쌍향수는 조계산 마루 천자암 뒤 뜰에 있다. 두 그루 향나무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쌍향수란 이름이 붙었는데, 나무 전체가 엿가락처럼 꼬였고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다. 높이 12.5m, 수령 800년으로 항상 구경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52.

 

 

 

 

 

 

#53. 송광사 경내

 

...송광사에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를 한 번쯤 여행해 본 이라면 혹여, 다른 사찰과 비교해 볼 때 무엇인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계산 자락 아늑한 터에 위치한 웅장한 모습의 송광사 경내에는 사찰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석탑과 석등이 보이질 않는다. 우선 풍수지리에 의한 가람의 배치도에서 몇 가지 연유를 엿볼 수 있다.


송광사는 다른 사찰과 비교해 볼 때 그 형상이 여성의 모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조계산 자락이 병풍처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 형상이 마치 단아한 연꽃 봉우리 같아,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 자락은 연꽃의 잎사귀 형상이며 송광사 경내의 목조건물들은 마치 연꽃의 꽃술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의 연꽃 봉우리 지형에 석물(石物)인 석탑이나 석등을 올려 놓는다는 것은 곧, 꽃 봉우리를 가라앉히는 격이 되니 석탑이나 석등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는 이곳 송광사가 솔개형상을 하고 있는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옮길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송광사 국사전 뒷등에 내려앉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솔개(새)의 지형에 위치한 새의 등에 돌을 올려 놓으면 새가 날 수 없게 되니, 석물(石物)을 설치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이 불(火)의 기운이 흐르는 지형을 하고 있다라는 것. 그렇다보니 화엄의 법계도에 의한 화엄도량을 상징하는 건물양식의 대표격인 송광사에 불의 형상인 석등을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역사를 거슬러 볼 때 송광사 창건 이후 실제로 이곳에는 수많은 화재사건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이처럼 역사적인 도량들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가 하면, 1842년(헌종8년)에도 큰 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탄 사건들이 있었다. 또한 1948년 여수 순천 사건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절 주변의 많은 숲이 훼손되고 대웅전 등이 불에 타버렸는데 이를 1955~1961년 사이에 취봉(翠峰)과 금당(錦堂)이 이를 복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볼 때 송광사의 절터는 불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라는 게 현실성에 가깝게 비춰진다.그래서 일까? 송광사 목조건물들의 계단에는 불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사자상들이 어느 건물에나 배치되어 있고, 승보전 앞에 있는 물화수 역시 이런 불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설치해 놓은 구조물이라니 가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출처] 길위에 버린 생각


 

 

 

 

 

#54. 우화각(羽化閣)

 

...우화각(羽化閣)은 대웅보전 앞 마당으로 가는 연못 위에 홍교(虹橋)를 가설하고 그 위에 세운 누각이다. 기록에 의하면 1700년 초에 조성했고 1774년(영조50)에 중수하였다.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도 하는데 입구 쪽은 팔작, 출구 쪽은 맞배지붕 양식을 지녔다.

이 곳에서는 맑은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스치고 물 속에 어리는 고목의 나뭇가지가 펼치는 아취(雅趣)를 맛볼 수 있다. 문장에 서투른 이도 저절로 시가 나올 듯 하다. 사람의 감정은 고금이 다르지 않는지 누각 안에는 예부터 이 곳을 거쳐간 시인묵객의 문장이 가득 걸려있다.

누각 이름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에 나오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에서 유래한 듯 하다.

 

 

 

 

 

 

#55.

 

 

 

 

 

 

#56.

 

...[홍예교]

명경(明鏡)처럼 투명하면서도 잔잔하게 주위 풍경을 담고 있는 시내 위로는 아담한 무지개다리(홍예교)가  놓여있다. 질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이 홍예교는 인공이면서도 인공이 아닌 듯 주변의 자연풍광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홍예교 위로 우화각(羽化閣)이 세워져 있는데, 저 다리에 오르면 ‘우화(羽化)'라는 명칭처럼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만 같다.  

 

대웅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갈려면 송광사 우화각(羽化閣)을 지나가야 하는데 우화각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경치는 마치 풍류를 논하던 예인들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게 한다.

전라남도유형문화제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화각은 羽化라는 의미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는 것으로 세속의 무게를 훌훌털어버리고 정진하여 해탈을 얻으라는 뜻인듯 하다.

-[출처] 길위에 버린 생각

 

 

 

 

#57. 송광사 일주문

 

 

 

 

 

 

#58.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59.

 

 

 

 

 

 

#60.

 

 

...

 

 

송광사에서

 

 

                     -김지하

 

 


극락에 있어라
내 등을 밟고

너 극락에 있어라
내 일일랑 잊고

송광사 산문 앞
합장조차 못한 채
엉거주춤 섰는 내 일일랑 아예 잊고

극락에 있어라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잠시만이라도
극락에 있어

소식 다오
극락 소식 나 기다린다는 소식

어차피 물에 잠길
섬진강 곁 마을터에
등 구부린 채 외로 섰는
내 일일랑 잊고

술 한잔 마련 없는
은어 고장
운오 씨도 마른 고장
송광사 산문 앞에
너는 있어라


내 등을 밟고
극락에 있어라.

 

 

 

 

#61. 청량각(淸凉閣)

 

 

 

 

 

 

#62. 청량각(淸凉閣)

 

 

 

 

 

 

#63.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64. 송광사

 

 

 

 

 

 

#65. 산행지도